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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Central New Jersey Church of C 2011-11-21 추천 0 댓글 0 조회 867



주기도문(The Lord's prayer)

 

1. 마태복음 6장 9-13절과 누가복음 11장 2-4절 구문비교

마태복음 6장 9-13절

누가복음 11장 2-4절

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1)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똑같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이다. 그런데 왜 마태복음의 주기도문만 예배순서에 들어갈까?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예배시간 순서에 들어가면 안 될까? 혹은 한 주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예배순서에, 다른 한 주는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예배순서에 포함시키는 것은 어떨까?

2) 오늘날 성경학자들이 말하는 공통점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보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원문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6장 9-13절의 괄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가장 초기의 헬라어 성경사본들에는 없다. 심지어 누가복음 11장 4절의 후반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조차 가장 초기의 헬라어 성경사본에는 없다고 Hans Dieter Betz(The Sermon on the Mount: Hermeneia Serie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95, pages 414-415)는 말했다.

Cf. 지금 우리가 접하는 개역한글 신약성경은 중국의 Wenli Version(1852)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서 헬라어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로 표기, 4세기)이다.

3)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라고 예배 시에 마태복음의 주기도문만 암송하는 것은 이미 그것만으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다. 기도가 형식이 되는 것이다.

 

2. 마태복음 6장 9-13절의 주기도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관점

 

1)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이라고 부르는데, 성경에는 이렇게 불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것은 사실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형으로서 주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주님의 기도, 즉 주기도”가 아니어야 한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맞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6장 12절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때문이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로서 권위를 가진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2) 마태복음 6장 10절의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움으로 이 기도는 이미 이루어졌다(마태복음 16장 18절 참조). 여기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마가복음 9장 1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를 보자. 여기에 중요한 단어는 “임하는”과 “볼 자들”이다.

만약 이 구절에서 “권능으로 임하는 나라”가 “앞으로 임할 새 예루살렘”을 뜻하고, “볼 자들”이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만을 뜻한다면 예수님은 거짓말하신 것이 된다. 왜냐하면 “임하는”는 미래완료시제이고, “볼 자들”은 단수가 아닌 복수이기 때문이다. 즉, 마가복음 9장에서 저자는 이미 권능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교회)를 예수님의 당시의 시점에서 미래에 이루어질 나라(교회)로 적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자 열 둘 중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이 복수이므로 요한만 보면 안 된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경에는 요한 외에 앞으로 올 새 예루살렘에 대해 보았다고 기록한 사람은 없다.

 

Cf.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은 같은 의미인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를 뜻한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주권이 있고,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시대와 장소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교회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고린도전서 1장 2절 참조)이다. 그래서 교회의 성립요건은 하나님의 주권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린도전서 12장 4-6절 참조). 민주주의의 개념이나 장소의 개념이 강한 교회는 인권신장이나 큰 건물은 자랑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정말 주기도문이 필요한지 모른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기도도 달려져야 한다.

 

3) 마태복음 6장 13절의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마태복음 6장 9-13절과 누가복음 11장 2-4절의 대조를 통해 알아보았다.

 

4)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하솔들에게 잡히시기 전 “최후의 만찬”에서 그것도 3회에 걸쳐 “내 이름”으로 기도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요한복음 14장 13-14절, 15장 16절, 16장 24절).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16장 24절이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비밀이 풀린다.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으로 볼 때, 요한복음 13-17장에 걸쳐 나오는 “최후의 만찬”에 대한 요한의 서술보다 훨씬 이전의 공생애 기간에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6장 24절의 말씀, 곧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를 통해 이 구절 이전의 기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구절 이후의 기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이후 우리는 어떠한 기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응답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 이후의 성경말씀에는 기도가 없느냐? 아니 있다. 한 예로 에베소서 3장 14-21절의 말씀을 들어보자. 바울의 에베소를 향한 기도인데, 이 기도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하지만, 이 구절들을 자세히 보시면, 예수님의 이름, 즉 “이름”(15절), “그리스도”(17, 18절), “그리스도 예수”(21절)를 불러가며 기도한 바울의 마음이 구구절절히 녹아있음을 알게 된다. 특별히 21절은 오늘날 저희들이 기도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리므로 예수님의 이름, 그 거룩하신 이름이 우리의 기도 안에서 녹아져야 한다. 단지 우리들의 입술로만 반복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지를 깨달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이 기도 전반에 묻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3.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서 주기도문에 대한 올바른 해석

 

칼 바르트는 기도는 “모든 예배의 전제, 크리스찬의 삶의 기본”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종교개혁 당시 주기도문은 지금 현재 기존의 교파교회가 하는 것처럼 맨 나중에 암송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 예배의 시작 전에 했다. 장로교의 대표하는 인물인 칼빈은 매주 예배의 시작 전에 주기도문을 강해했다. 그리고 그것을 암송케 했다. 왜냐하면 예배의 시작 전에 주기도문을 강해하고 암송케 함으로써 주기도문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모형임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칼빈 뿐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그와 같이 예배의 앞에 주기도문을 낭송케 하였다. 이것은 지금의 교파교회들이 단지 예배의 형식에 치우쳐 되뇌는 “주기도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장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예배의 형식이 아닌, 우리의 삶에, 우리의 생활 속에서 기도를 드리자. 곧, 쉬지 말고 기도하자(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에 응답받자는 것이고, 그래서 기도의 능력자로서 살아가자는 것이며, 그래서 기도의 삶이 나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전이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을 믿는 크리스천이라면 모두가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듯이, 우리도 당연히 그리스도의 삶의 기본인 기도로서 온전한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마태복음 6장 9-13절을 중심으로)를 온전히 배우길 원한다. 보통 교파교회에서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를 합쳐 4가지 청원(요청)으로 나눈다. 하지만, 우리는 앞의 “대개”로 시작되는 구절에 대해 왜 이 구절이 주기도문에 포함될 수 없는지 배웠으니까, 이 구절을 빼고 3가지 청원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1) 제 1청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것의 의미는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는 뜻이다.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한다. 곧, 내재(immanence)와 초월(transcendence)의 하나님, 관계(relational ability)와 통치(sovereignty)의 하나님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온 우주를 통치하신다. 그와 같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렇기에 감히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선물하셨다.

 

예수님의 사람됨(humanity)과 아들됨(sonship)을 우리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기도로서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먼저 통치자 이신 하나님, 그렇지만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려야 한다. 나와 기도로서 관계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나와 대화하시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을 매일 매일의 기도로서 만나드려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1청원은 2청원과 3청원의 요약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도한 것이 2청원이고, “우리 아버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도한 것이 3청원이기 때문이다.

 

2) 제 2청원(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니이다”

2청원에는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요청들(petitions)과 고백들(confessions)이 있다. 요청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 위해 일(work)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이요, 고백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전적인 충성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둘은 같아 보이나 하나이다. 요청이 곧 고백이요, 고백이 곧 요청이다. 예를 들어보자(따옴표“ ”에 있는 것은 요청이고, 괄호( )에 있는 것은 고백입니다).

 

“하나님,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을 가득하게 하실 줄을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소서! 하나님의 이름이 당연히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실 줄을 나는 당연히 믿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 가득히 넘쳐나게 하옵소서! 이 세상에 편만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편만하게 하실 줄을 내가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의 죄와 억압과 부도덕이, 부정이 종식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의 죄와 억압과 부도덕과 부정을 종식시키실 줄을 내가 믿습니다.)

 

요청이 곧 고백이요, 고백이 곧 요청임이 느껴지는가?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나오는 요청들은 예를 들어 보아서 알겠지만, 하나님의 반역자(사단)를 꺾으실 하나님의 마지막 승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의 비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실 줄을 믿고 고백하는 기도인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요청은 결국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는 우리의 믿음과 고백이요, 우리의 충성인 것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예를 우리는 찾을 수 있는데, 요한계시록 22장 20절처럼 기도하는 것이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

 

3) 제 3청원(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2청원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과 충성의 기도였고, 하나님이 그 중심이었다면, 3청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약속을 바라보고 우리의 필요를 요청하는 기도이다. 그렇기에 그 중심은 우리에게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마태복음 6장 9-13절)는 바로 마태복음 6장의 주제성구과 맥을 같이 하는데, 곧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는 구절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면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의 필요에 반응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장 30, 32절).


또한 3청원은 3가지 주제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곧 양식(bread), 용서(forgiveness), 그리고 구원(deliverance)이다. 만약 우리에게 이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귀머거리요, 소경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과 같이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을 경험하셨다. 그 때 이스라엘은 양식이 없다고 불평했으며, 12 정탐꾼 중에 믿음의 보고를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으며, 모세의 리더십에 제동을 걸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나안을 맛보지 못했다. 이는 다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것이다. 악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기도로서 제자들에게(우리들에게) 2청원을 먼저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바로 서있으면, 하나님 중심으로 보고 들으며 살아간다면, 우리가 시험에 빠질 이유도 없다. 양식으로 인한 걱정이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이해되고 용서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것을 막게 되고, 악으로부터 구원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1, 2, 3청원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과 나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서면,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도 바로 서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곧 새 계명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인 동시에, 그 기도에 새 계명을 심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새 계명이 무엇인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7-40절, 누가복음 10장 2절 참조)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이곳이 곧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곧 성경 말씀이다 말한다. 이 기도 안에 예수님께서 공생애와 구속사, 그리고 성경이 다 녹아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완벽하다. 온전하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 당연하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그런데, 단지 형식적으로 낭송하는 기도를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아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같이 기도하라는 것이다. 먼저 주님을 높이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 그럴 때, 우리의 필요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보인다. 그 아버지 붙잡고 탄원한다. 주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날마다 우리가 세상의 필요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아니하도록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 아뢰는 것이다.


기억하셔야 할 것은 기도가 온전한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이 3가지 청원이 다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이웃과 우리의 삶을 다 아울러야 한다. 사실 성경에는 기도들은 많이 있다. 짧은 숨기도들도 많이 보인다. “주여, 오시옵소서!,”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등등. 그런데, 우리가 온전하고 전심으로 기도 드리기 위해서는 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같이 이 3가지 청원으로 기도드려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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